예수님을 빼놓고 유대교를 논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정체성의 모든 것(이를테면, 율법과 선지자, 심지어 관습과 전통까지)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없는 유대교는 ‘불완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크게 거부한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아는가? 다름 아닌 유대인이다. 예수님께서 삶으로 대표해 주셨던 바로 그 유대인이 예수님을 가장 크게 거절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비극 아닌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만의 구세주가 아니시다. 그분은 유다의 사자이시고 유다 왕가에서 태어난 왕이시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시다. 장차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요 12:32).
신약과 구약을 연결하는 영원한 끈들을 많이 발견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열정 역시 증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영적 분열’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인격이 분리된 양,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왜곡된 인식을 지닌 채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은 ‘엄격한 입법자’, ‘쉽게 분노하는 재판관’ 같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어떤 죄도 간과하고 덮어 두실 만큼 자비로우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1장 옛 보물의 재발견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오순절(칠칠절) 날, 시내산에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날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후 약 1,500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일한 오순절 날, 하나님은 또다시 ‘불’ 가운데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오래전 시내산에서 불과 구름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성령 강림을 통해 그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날 성도들은 산꼭대기에 임하신 하나님을 본 게 아니라, 자신들 속에 임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관련된 예언 중 ‘유다 지파의 사자’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같고 암사자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9-10). 그리고 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유다의 사자’라고 표현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메시아 관련 예언 중 예수님께 붙여진 ‘유다의 사자’는 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토록 유대인이시다!
2장 예수님의 유대인 정체성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기름 부음 받은 자, 메쉬아흐,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큼 ‘유대인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궁극적 유대인이시고, 유대인의 왕이시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시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이 달리신 십자가의 죄패에는 이러한 타이틀이 기록되었다. “유대인의 왕 예수”(마 27:37).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방위적 성취이시다. 예수님은 진정한 유대인이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유대인이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3장 질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구약의 지식이 필요했듯이 오늘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약의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은 신약과 구약의 기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구약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역시 중요하다.
이방인 교회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이유로(로마의 세금 부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 회당 출입 중단 등) 신구약의 진리 기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유대인의 특성을 잃어 갔다. 타나크를 읽지도 않고, 타나크를 설명해 줄 사람도 없고(설명해 줄 사람은 둘째 치고 토론을 이끌 만한 사람조차 없었다), 회당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므로 이방인 교회의 예배는 점차 간증이나 신비한 체험 그리고 각 사람의 의견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 거짓 교리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래서 바울 및 여러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이단과 관련한 신학 주제들을 설명한 것이다. 이방인 교회는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외부적으로는 반기독교 세력의 박해를 받았고, 내부적으로는 ‘구약 성경을 알지 못해서’ 이단에 휩쓸릴 위험과 마주해야 했다.
7장 반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몇몇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거룩의 본질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은혜부터 입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은 우리를 만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은혜부터 베풀어 주셔야 한다.
8장 하나님의 본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 은혜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셨다. 예슈아께서 오시기 전,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으로 인해, 당시 야만적인 세상 나라들로부터 성별될 수 있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고차원적 정의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가 반영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를 나타내셨을 때, 기존의 정의 시스템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며, 시내산(모세의 율법)보다 더 높은 산으로(산상수훈) 제자들을 부르셨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산상수훈이 전달된 그 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더 많이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모세의 율법을 따를지, 더 높은 차원의 은혜의 율법을 따를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당신은 모세의 율법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9장 율법과 은혜
율법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생각이 깊게 스며 있다. 그렇다. 율법은 무미건조한 규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과 사랑, 용서와 공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향한 관대함, 긍휼, 가난한 자들과 압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나타내셨다. 율법은 딱딱한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은 율법이 복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저주로 변질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죄성으로 율법의 목적을 오염시켰다. 율법을 바라보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대신, 그들은 율법 준수의 공력을 쌓는 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다.
10장 율법의 목적
예수님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이유이시다. 유대교의 여정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유대인은 계속해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기억하라. 예수님은 성경적 유대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기독교는 어떤가? 그리스도인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비성경적 신학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가 유대인의 역사를 ‘청산할 잔재’ 정도로 치부하고 제거해 버렸다. 일면 기독교는 최종 목적지에(그리스도) 도착한 비행기와 같다. 그러나 그 비행기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잊었다.
14장 결론